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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가의 무대 선유도 - 영등포story9
작성자 문화원 등록일 2020-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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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story9. 공무도하가의 무대는 선유도]

 

 

영등포구는 현존하는 한강 속의 주요 섬을 가장 많이 보유한 자치구로서 아래 설명하고 있는 선유도와 서강대교 밑 중앙 하중도인 한강밤섬,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이 있는 여의도이렇게 3개의 섬이 있다.

 

 

#선유도

-소재지 : 영등포구 양화동 95, 양화대교 중앙 하중도

 

 

옛 풍류의 섬 선유도

원래 선유도란 섬 이름보다 선유봉(仙遊峰)으로 더 알려진 89,917(27,200)의 이 섬은 양화대교 중앙에 있는 작은 섬으로, 신선들이 노니는 곳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는 것처럼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섬이었다한다. 개발을 위한 석재 채취 등으로 예전의 봉우리는 없어지고, 정수장이 세워져 오랫동안 사용되다가 20025월에는 선유도공원이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선유봉은 산봉우리가 해발 40m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섬모양이 고양이 같다 하여 괭이산(고양이산)이라고도 불러 인근 쥐산과 대조를 이루었으며 선유봉 암석의 꿋꿋함을 칭송하여 중국 황하의 지주봉(砥柱峰)을 견주어 말하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선유봉에 인접했던 양화도 나루사이에 백사장이 많고 수심이 낮아 건기 때엔 거의 걸어서 건널 수 있었으며, 마포와의 사이엔 강폭이 넓고 물결이 잔잔하여 강상(江上)에 취흥을 돋우는 배를 띄우기가 좋았다. 일찍이 선유봉은 고려시대부터 번성했던 양화도 나루를 경유하여 마포의 잠두봉(蠶頭峰)을 잇는 한강의 절경소로 이곳에서 시와 그림, 그리고 춤이 널리 성행되어 유상차(遊賞次) 잠시 들른 중국 사신들까지도 그 풍경에 감탄하여 수많은 시를 읊었으며, 강산풍월(江山風月)을 좋아하는 많은 풍류객(風流客)들은 이곳에 누각 또는 정자를 짓고 거처하거나 선유봉 주변 한강에 놀이배를 띄우고서 풍치를 즐겼다.

 

 

그 중에는 왕위를 세종에게 양보하고 명산대천의 자연풍경을 즐겨 찾았던 양녕대군(讓寧大君)은 말년에 여기에 영복정(榮福亭)을 짓고서 한가롭게 지냈다 하며, 조선시대의 대표적 화가인 겸재 정선(謙齋 鄭敾)1741년경에 선유봉을 배경으로 하여 양화환도(楊花喚渡)」 「금성평사(錦城平沙)」 「소악후월(小岳後月)3편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남기기도 했다.

 

 

공무도하가의 무대는 선유도?

또한, 선유봉과 인접한 양천지역의 기록서인 1899京畿陽川君邑誌地圖(경기 양천군 읍지지도)에 보면 “藿里子高 妻 麗玉 揚花渡 見人沒作 ??引 彈 公無渡河曲云 (곽리자고 처 여옥 양화도 견인몰작 공후인 탄 공무도하곡운)” 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를 해석해 보면 곽리자고의 처 여옥이가 양화도(선유도)에서 사람이 빠져 죽는 것을 보고 공후인을 지어서 공후를 탔다는 공무도하곡이 전해오고 있다라는 문구로 우리나라 국문학상 최초의 노래인 공무도하가는 그 시대적 무대가 고금주(古今注) <해동역사. 海東繹史>라는 문헌에 의해 대동강변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 손주영씨는 위 문구를 들어 공무도하가의 무대가 어디인지 새로이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강서문화와 역사(98)에서 새로이 밝히고 있다.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선유봉 암벽에 중국 황하강 가운데 있는 산의 이름으로 격류 속에서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을 의미하는 지주(砥柱)란 글자를 새겨, 선유봉 암석의 기풍을 선비의 꿋꿋한 지조에 비유하였다.

한편 선유봉에는 예부터 인가가 많지 않았는데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주로 고기잡이와 밭농사 그리고 안성 유기그릇 등을 만들어 팔면서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하였다 한다,

 

 

일제의 한강치수사업을 계기로 해체되는 비운의 선유도

그러나 이 선유봉은 1925년 대홍수 후 일제가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의도로 의심되기도 하는 석연치 않은 한강치수사업을 계기로 서울의 화표(華表)인 선유봉의 암석들이 마구 체취당해 제방을 쌓거나 대동아전쟁 물자조달에 사용되어지는 등 점차 봉우리가 해체되는 비운을 맞았으며 해방 후에도 개발우선 도시개발의 여파로 남아있던 선유봉 암석들마저 계속 채취되었으며 1965년 양화대교가 관통되면서 대부분 허물어졌으며 이곳에 1978년 선유정수장이 설치됨으로써 안타깝게도 선유봉의 그 아름다운 옛 모습을 모조리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예전에 선유봉에 있었던 사찰인 용화사(일명 선유봉 절)의 부처와 미륵은 6.25동란 중 미군에 의해 노량진본동 473-4 극락정사로 옮겨 모셔져 있다.

 

 

선유공원으로 재탄생

하지만 2002년 월드컵 개최 전인 5월에 선유도공원이 문을 열었다. 옛날처럼 수려한 자연경관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막힘없이 바라보는 한강이 시원하고 고개를 돌리면 월드컵 경기장에서부터 북한산, 남산, 여의도까지 한 번에 볼 수 있는 것으로 봐서 매우 좋은 위치임에는 틀림없다.

선유도공원에는 선유정, 선유나루, 원형소극장, 한강역사관, 시간의 정원, 만남의 숲, 열린마당 등 여러 가지 테마 정원 등 다양한 시설들이 있으며, 옛 정수처리장의 기둥들로 이루어진 멋진 정원과 이름 모를 풀들 사이에 튀어나와 있는 옛 벽의 흔적, 원형 구조물 등 자연과 인공이 평화롭게 어우러진 매력적인 공원으로 탈바꿈 하였다. 또한 한강시민공원 양화지구와선유도 공원을 잇는 선유교 역시 공원과 조화를 이루는 멋진 시설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선유도는 그 옛날 신선이 노닐던 곳이라는 옛 명성에 버금가는 한강 속 풍류의 섬으로 새롭게 떠오를 전망이다.

 

 

&겸재 정선의 그림에 대하여,

 

18세기 전반에 그려진 겸재 정선의 그림은 진경산수화라 부른다.

그는 우리나라 경치를 직접 눈으로 보고 사생하여 실제 경치를 화폭에 담았다.

당시 화단은 중국의 경치를 그려왔으나 그러한 경향이 정선에 이르러 바뀌게 되었으며 그는 임진왜란 이후 성숙해졌던 민족적 각성, 실학과 국학의 연구 등으로 새롭게 일어났던 사회분위기를 바탕으로 그림에서 사실주의를 실천해 내었다.

그렇기에 그의 그림들은 개발이전의 우리나라 산천의 모습을 증언하는 귀중한 기록화인 것이다.

 

 

출처 : 永登浦 近代100年史,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청, 2011.

*고금주(古今注)

중국 진()나라의 최표(崔豹)가 명물(名物)을 고증하여 엮은 책. 고조선때의 노래인 공무도하가의 배경 설화가 실려 있다. 3.

 

 

*지주(砥柱)

중국 하남성(河南省) 섬주(陝州)에서 동쪽으로 40리 되는 황하(黃河)의 중류에 있는 기둥 모양의 돌. 위가 판판하여 숫돌 같으며, 격류(激流) 속에서 우뚝 솟아 꼼짝도 하지 않으므로, 난세(亂世)에 처하여 의연(毅然)히 절개를 지키는 선비의 비유로 쓰임.

 

 

금성평사, 겸재 정선

소악후월, 겸재 정선

양화환도, 겸재 정선

선유도 전경, 영등포구청 홈페이지, 포토갤러리

#영등포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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