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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許穆)의 <삼현사기(三賢祠記)>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7-09-07 조회수 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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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허목(許穆, 1595∼1682)의 <<기언(記言)>>에 실려 있는 <삼현사기(三賢祠記)>를 번역한 글이다.

 

  금천현(衿川縣) 한천(寒泉)에 삼현사(三賢祠)가 있다. 삼현사는 고려 강태사(姜太師) 서장령(徐掌令)과 우리 조선 선조공신(宣祖功臣) 완편(完平) 이상국(李相國)의 사당이다.

  태사는 문종(文宗) 현종(顯宗)을 섬겼다. 전례(典禮)를 상고해서 국사(國社 : 나라에서 토지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정비하여 방구감단(方丘坎壇(방구(方丘) : 토지신에게 제사하는 단, 감(坎) : 한신(寒神)과 하천 천택(泉澤)의 신에게 제사하는 단, 단(壇) : 서신(暑神)과 산림 구릉의 신에게 제사하는 단))의 제도를 정하였고, 백관(百官)의 의식과 예법을 수립하였다. 거란의 남침을 당해서는 군신(君臣)이 크게 두려워하여 속수무책으로 신하가 되기를 빌려고 하였으나 태사가 정색을 하고 예(禮)를 지키고, 의(義)로써 자신의 자리를 굳게 지키니 의가 밝게 드러나서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였다.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자 나라가 강해져 마침내 거란을 이겨 파하였다. 왕이 찬탄하여 가로되

 

  예의를 지켜 온 나라가 좌임(左?)을 하지 않게 되었으니 충신의 공덕이다.

 

  라고 하였다. 발탁하여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에 올랐고, 여러 번 벼슬이 더하여 태사(太師)가 되고 개국후(開國侯)에 봉해졌다. 늙어 벼슬에서 물러나 졸하니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사(事)적이 <<여사(麗史 : 고려사)>> <본전(本傳)>에 실려 있다.

  서장령은 고려의 말세를 만나 위험을 당하고도 굽히지 않았고, 익양(益陽 :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 추증된 정몽주의 봉작)의 죽음에 이르러서는 폐하여 서인(庶人)이 되었다. 나라가 망하고는 금천에 살았는데 의리를 지켜 옛 나라를 잊지 않고 앉을 때는 북쪽을 향해 앉았고, 죽을 때까지 한양성곽을 마주하지 않았으며, 사물에 의탁하여 시를 읊어 스스로 몸을 상하게 했다. 혹 견(甄)이 읊는 노래에 변란을 일으킬 생각이 있으니 마땅히 그에 따른 벌을 주어야 한다는 의론이 있었으나 태종(太宗)이 가로되

 

  견(甄)은 이제(夷齊))의 윤(倫)리를 가지고 있다. 벌할 수 없다.

 

  라고 하였다. 선조(宣祖)시절에 이르러 재상(宰相) 윤근수(尹根壽, 1537∼1616)가 임금께 아뢰어 충신총(忠臣塚)으로 봉(封 : 묘의 흙을 북돋아 줌)하였다.

  이상국은 선조(宣祖)를 섬겼다. 나라의 큰 난리를 당하여 몸과 마음이 지쳐 쓰러질 정도 힘을 다하여 사직(社稷)을 보존하였다. 관서(關西)지방을 안절(按節 : 관찰사의 직무를 수행함)해서는 관서백성들이 산 제사로 보답하였고, 남방(南方)에 관아를 설치해서는 남방사람들이 신명(神明 : 하늘과 땅의 신령)처럼 그를 믿었다. 광해(光海)가 무도하여 사람이 지켜야 될 기(紀)강이 괴멸되어 없어지자 상국(相國)이 가로되

 

  나라가 망하게 되면 그 재앙을 고스란히 받게 되는 법입니다.

 

  하고, 임금에게 간(諫)하여 굽히지 않았다. 광해가 자기를 비방한다고 생각하여 멀리하여 내쫓았다. 그러나 그 말에 힘입어 인심(人心)이 밝고 환하게 되었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 인조(仁祖) 원(1623)년에 다시 중흥(中興)의 역할을 맡은 재상이 되었으니 몸에 국가안위가 달려 있던 것이 전후(前後)로 40년이었다. 88세에 졸하니 시호를 문충(文忠)이라고 하였다. 상국이 세 조정의 재상을 하면서 정치(治)의 요체(體)를 존중하였고, 유술(儒術 : 유학(儒學))을 중히 여겼으며, 절검(節儉)을 좋아하였고, 진퇴(進退)의 의(義)리를 밝혔으니 사방의 인심이 귀의하여 선인세회복명신(宣仁世恢復名臣 : 선조 인조시절의 회복명신)이라 칭하였다. 이는 어짊의 등급에 있어 첫째가 되는 것이니 그 어짊은 마땅히 백대(百代)에 걸쳐 식(食)읍을 내려 보답해야 한다. 하물며 <<사전(祀典 : 나라의 제사를 지내는 의례를 적은 책)>>에 가로되 법을 알려주어 백성을 교화한 신하를 제사하고, 죽음으로써 정사에 힘쓴 신하를 제사하며, 힘써 나라를 안정시킨 신하를 제사는 것이라 하지 않았는가?

  지금 봉천(奉天)을 강태사지향(姜太師之鄕)이라고 하고, 그가 태어날 때에 상서로운 별이 떨어졌다고 하는데 믿을 수 있지 않은가? 고을 북쪽 10리에 있는 번당(燔塘)에 서장령의 묘가 있다. 연성(蓮城 : 안산(安山)의 별칭)과 경계에 있는 오리동(梧里洞)에 이상국의 세장(世葬 : 조상 대대로 쓴 묘)이 있다. 처음에 상국이 고을의 부로(父老)들과 더불어 이현사(二賢祠)를 세울 것을 의논하였는데 이루지 못하고서 상국이 졸하였다. 그 뒤 25년이 지나 고을사람들이 상국을 아울러 사당에 모시고 이름을 삼현사(三賢祠)라고 하였다. 그 사당을 세운 해는 지금의 임금이 즉위한 지 9년이 되는 무술(戊戌, 1658)년이다. 그 9월 상완(上浣)에 공암(孔巖 : 허목의 본관인 양천(陽川)의 옛 이름) 허목(許穆)은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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