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story2. 도심 속의 철새도래지로 변모한 옛 유인도 한강 밤섬 한강의 밤섬은 한자어 율도(栗島)로 표기되는 섬으로 그 섬의 모양새가 마치 밤알을 까놓은 것 같이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가산(駕山)이라고도 불리며 여의도의 별칭인 나의주(羅衣州)와 상응하여 율주(栗州)라고도 불려졌다. 이곳은 총 면적이 241,490㎡로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속하는 윗밤섬과 마포구 당인동에 속하는 아래밤섬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그 사이로는 강물이 흐르고 있다. 이 섬의 동부와 서부에 발달된 하식애는 소해금강이라고 불렸으며, 큰 밤섬 아래는 한강의 퇴적으로 9개의 작은 하중도(河中島)가 연속되고 수십 리의 백사장을 이루어 일찍이 「서울명소고적」에서 서호팔경의 하나인 율도명사(栗島明沙)라 하였듯이 주변경관이 절경을 이루었다 한다. 인접한 여의도가 점점 넓은 하중도로 발달해 예전엔 도선장(渡船場)으로서 홍수 때를 제외하고 여의도 사이의 백사장을 건너 인천 등으로 가는 간로(間路)가 되었다. 또한, 한강의 밤섬은 「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 고려 때 귀양 보내던 섬이었다 하며, 1394년 조선의 서울 천도와 함께 배 만드는 기술자들이 주로 처음 정착해서, 백사장과 한강수운을 활용하여 6.25사변 이전까지 조선업과 뱃사공, 물산도선하역 등이 널리 성행되었으며, 「용재총화」 문헌에 의하면 세종. 성종시대에 뽕나무를 많이 심어서 ‘나라의 뽕밭’이라고 하면서 누에치기가 성행되었다고 한다. 「명조실록」11년 4월조에 나타난 밤섬주민의 생활상을 보면 수도 서울에 있으면서도 이곳의 한강물이 워낙 깨끗하여 이주 전까지 식수로 직접 마셨다고 하며, 외부로의 왕래가 뜸해 남의 이목을 덜 의식한 듯 섬주민의 생활방식이 대체로 자유분방하여 남녀가 서로 업고 업히고 정답게 강을 건너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아 동성동본이고 반상이고 따지지 않고 의논 맞춰 살면서 조금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마씨, 인씨, 석씨, 선씨 등 희귀성을 가진 대가족들이 특히 많이 집단 거주하면서 은행나무 고목(당산목)과 부군당이 있어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였다. 한편, 밤섬은 1968.2.10. 여의도개발의 일환으로 폭파되어 당시 62가구 443명의 원주민은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의 산중턱으로 집단이주하였으며 밤섬은 시간이 지나면서 한강에 의하여 퇴적물이 쌓이고 억새, 갯버들 등 친수식물이 자생하면서 1990년대에 들어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도심 속의 철새 도래지로 부각되어 1999.8.10. 서울시가 「생태보전지역」으로 지정. 고시하여 특별보전해오고 있다. 그런데 한강밤섬은 폭파 당시 향후 철새도래지 조성을 전제로 무인도화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섬 중앙에 서강대교가 관통하고 있어, 한강밤섬이 철새도래지를 포함한 모범적인 생태계 보전지역으로 각광 받기 위해서는 홍수 및 차량공해 등의 문제에 대한 보다 효과적인 묘안 강구가 필요시 되고 있다. ◇ 밤섬의 일반 현황 구역별 위치 -큰 섬(서강대교 동쪽) 영등포구 여의도동 84-8 -작은섬(서강대교 서쪽) 마포구 당인동 313 면적 : 241,490㎡ ※큰 섬 → 137,570㎡ 표고(섬 높이) : 3.0~5.5m ※홍수 등으로 팔당댐 과다방류 시 수시 침수 섬 둘레 상태 : 벌, 모래, 자갈 등 ◇ 생태계 현황 밤섬에 날아오는 철새 -청둥오리, 황조롱이, 원앙이, 왜가리 등 25여종. 최고 5,000여 마리 밤섬에 살고 있는 어류 -누치, 동자개, 잉어, 쏘가리 등 29여종 밤섬에 서식 중인 식물 -물억새, 금낭화, 붉은털어귀, 용버들 등 189종
여의도 개발의 의미와 여의도의 미래 여의도 개발은 1968년 당시 대한민국의 국운을 건 한강개발계획의 최대 기본사업이었다. 척박한 모래섬 여의도를 한국 최초의 계획 신시가지로 변모시키는데 쏟아 부은 민족적 저력이 서울 강남개발로, 경부. 호남고속도로와 구미신공단 건설로, 지역사회개선 새마을운동 등으로 이어진 국토개발붐을 전국적으로 가속화 시켜 여의도가 사실상 우리나라 경제부흥의 산신. 조국근대화의 상징인 한강의 기적이 가시적으로 점화된 발상지로서 지금도 전국의 주요 땅 면적 비교 시 ‘여의도 면적의 몇 배’식으로 활용되어 대한민국의 공식 면적 계량 단위로 사용되는 데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만 당초 여의도 개발 시 큰 축을 형성한 서울시청 이전이 여건 미조성으로 예정대로 이전치 않았으며 초창기 민간호응도가 낮아 주거지역이 당초 16만평에서 19만평으로 늘어나며 상업지역을 그 만큼 줄이는 등 우여곡절 끝에 본래의 체계적인 신도시 계획(안)과 다소의 차질이 발생된 아쉬움이 있다. 오늘날의 여의도는 기존 아파트의 초고층 재건축 붐과 아직도 원만치 못한 교통소통관계의 도시문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국회의사당. 여의도. 샛강을 통과하는 지하철 9호선이 2009년 7월 개통되고, 여의도 순환 경전철 설치도 검토되고 있으며, 국제금융지구 지정 등 글로벌 금융복합도시로의 변신을 모색해 더욱 쾌적하면서도 돋보이는 21세기 한강 속 신시가지로 단장되어 갈 것으로 기대된다. 출처 : 永登浦 近代100年史,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청,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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