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긍기 창원대 명예교수가 지은 <영등포의 정치와 문화이야기>에 ‘문래동 출신의 장군 이숙‘의 글은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문래동은 사촌리라고 불렸다. 그 사촌리에서 비장 이숙이란 분이 나왔다. 비장이란 날랜 장수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후기에 저술된 읍지들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비장(飛將) 이숙(李淑)은 사촌(沙村) 사람이다. 갑자(甲子, 1624)년에 역적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부원수(副元帥) 이수일(李守一)이 용맹하고 날랜 장수 8인을 뽑았는데 이숙도 거기에 뽑혔다. 밤을 틈타 역적의 진영에 쳐들어갔다가 병사와 장수가 모두 해를 입었는데 이숙만이 홀로 살아날 수 있었다, 손으로 수십백(數十百) 인을 쳐 죽였다. 왼쪽 넓적다리에 상처를 입었지만 기운은 더욱 씩씩하였고, 싸움을 할 때는 더욱 재빨라 역적들을 수십 리 밖으로 물리쳤다. 원수(元帥)가 이숙이 피를 흘리는 것을 보고 자신의 바지를 찢어 상처 난 넓적다리를 싸매주었다. 병자(丙子, 1636)년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때 호종(扈從)하여 벼슬이 정삼품(正三品)에 올랐다.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모셨다." 전주이씨 종친회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홈페이지의 ‘숙‘에 대한 인물 검색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이숙〔(李淑, 1595(선조 28)~1654(효종 4)〕 파명 : 덕천군(德川郡) 송림군의 현손이며 무양령(武陽令)의 손자다.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괄의 난에 이수일 장군을 따라 적진을 야습하다가 무릎에 부상을 입고도 용전(勇戰)하였으나 그 공을 원수에게 양보하여 2등이 되었다. 정묘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으로 임금을 호종하여 당상내금장(堂上內禁將)에 제수되었다. 배위는 해주최씨 식(湜)의 딸이다. 묘소는 사촌(沙村) 을좌에 있다." 민긍기 교수는 한참 전에 이숙 장군 얘기를 하시며 이숙 장군이 전주이씨 덕천군파 같은데 족보를 찾아서 확인해봤으면 좋겠다 하셨는데 확인이 안됐었다. 이건창의 당의통략을 읽으며 이숙 장군이 떠올랐고 대동종약원에 문의할 요량으로 홈페이지를 뒤지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인물검색을 하니 민긍기 교수가 쓴 내용과 같다. 인물 검색 내용은 족보 내용을 그대로 옮긴 듯하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영등포 출신으로 옛 자료에 나오는 인물로 이숙(李淑)말고는 못 들어봤다. ^송림군(松林君) 조선 2대왕 정종의 아들 덕천군은 4남 6녀를 두었고 4남이 송림군(松林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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