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저술한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조선 현종대) <금천현, 능묘>를 보면 다음과 같은 육신의총(六臣疑塚)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육신의총(六臣疑塚)이 현 북쪽 17리 노량(露梁) 아래 강기슭 서편에 있다. 육신(六臣)은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유응부(兪應孚)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이다. 본조(本朝) 혜장왕(惠莊王 : 세조) 때 충(忠)으로써 죽임을 당하였다. 세상에 전하기는 옛적 노량에서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옛날 글씨를 새긴 돌이 있었는데 박씨(朴氏) 유씨(兪氏) 이씨(李氏) 성씨(成氏)의 묘라고 하였다. 박씨의 묘가 남쪽에 있고, 그 다음 북쪽이 유씨의 묘라고 하고, 또 다음 북쪽이 이씨의 묘라고 하며, 또 다음 북쪽 10보 가량 떨어진 곳이 성씨의 묘라고 한다. 또 성씨의 묘 뒤는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이 묻혔다고 서로 전한다. 육신은 모두 후손이 없는데 오직 박팽년만이 후손이 있다. 효종 때 박팽년의 자손이 실기(實記)를 돌에 새겨 세웠다. 허목(許穆)이 지은 그 글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육신의 일을 세상에서 꺼리어 감춘 지 오래되어 당시의 일을 알기란 참으로 어렵다. 육신의 친척들은 모두 죽어 누구 하나 남은 이가 없으나 문하(門下) 중에 의를 숭상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어서 화(禍) 입을 것을 상관하지 않은 까닭에 몰래 각기 시신을 알아보고 서로 떠맡아 여기에 죽 장사지내고는 인하여 돌에 글을 새겨 그 장처를 표시하였다. 그러나 그 이름은 숨기고 모씨(某氏) 모씨라 하니 그렇게 쓴 표지가 슬프지 아니한가? 영남 선산부(善山府)에 하위지묘가 있는데 유독 유성원이 묻힌 곳이 없고, 또 거두어 묻힌 곳이 서로 다르니 알 수 없는 일이다. 또한 호서(湖西) 은진현(恩津縣)에 성삼문묘가 있는데 혹시 노량의 무덤은 신체의 일부인가? 사육신은 성삼문(成三問, 1418∼1456) 박팽년(朴彭年, 1417∼1456) 하위지(河緯地, 1412∼1456) 유응부(兪應孚, ?~1456) 이개(李塏, 1417∼1456) 유성원(柳誠源, ?~1456)을 지칭한다. 성삼문(成三問)은 자(字)가 근보(謹甫) 눌옹(訥翁)이고, 호(號)는 매죽헌(梅竹軒)이며, 홍성(洪城) 출신으로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박팽년(朴彭年)은 자가 인수(仁?)이고, 호는 취금헌(醉琴軒)이며, 회덕(懷德) 출신으로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하위지(河緯地)는 자가 천장(天章) 중장(仲章)이고, 호는 단계(丹溪)이며, 선산 출신으로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유응부(兪應孚)는 자가 신지(信之)이고, 호는 벽량(碧梁)이며, 포천 출신으로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이개(李塏)는 자가 청보(淸甫) 사고(士高)이고, 호는 백옥헌(白玉軒)이며, 본관은 한산(漢山)으로 이색(李穡, 1328년∼1396)의 증손이다. 유성원(柳誠源)은 자가 태초(太初)이고, 호는 낭간(琅?)이며,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