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영등포가 서울이 된 것은 1936년이다. 경기도 시흥군이었는데 그 때 경성부에 편입되었다. 다은은 영등포의 연혁을 정리한 것이다. 영등포구라는 지명이 이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1943년의 일이다. 이전에는 경성부(京城府) 영등포출장소(永登浦出張所)였는데 이 때 경성부가 구제(區制)를 실시하면서 경성부 영등포구(永登浦區)가 되었다. 그리하여 영등포구에는 영등포출장소에 속해 있던 영등포정(永登浦町) 도림동에서 분동된 사옥정(絲屋町) 당산정(堂山町) 양평정(楊坪町) 양화정(楊花町) 노량진정(鷺梁津町) 본동정(本洞町) 흑석정(黑石町) 동작정(銅雀町) 신길정(新吉町) 번대방정(番大方町) 도림정(道林町) 상도정(上道町)과 경성부에서 편입된 여의도정(汝矣島町)이 이에 속하여 경성부 영등포구 영등포정 사옥정 당산정 양평정 양화정 노량진정 본동정 흑석정 동작정 신길정 번대방정 도림정 상도정 여의도정이 되었다. 경성부 영등포출장소는 1936년 영등포정에 설치되었다. 이에 따라 이 때 일제(日帝)가 경성부(京城府)를 확장하면서 편입한 경기도(京畿道) 시흥군(始興郡) 영등포읍(永登浦邑)의 영등포리(永登浦里) 당산리(堂山里) 양평리(楊坪里)와 경기도 시흥군 북면(北面)의 노량진리(鷺梁津里) 본동리(本洞里) 흑석리(黑石里) 동작리(銅雀里) 신길리(新吉里) 번대방리(番大方里) 도림리(道林里), 경기도 시흥군 동면(東面)의 상도리(上道里), 경기도 김포군(金浦郡) 양동면(陽東面)의 양화리(楊花里)가 영등포정(永登浦町) 당산정(堂山町) 양평정(楊坪町) 노량진정(鷺梁津町) 본동정(本洞町) 흑석정(黑石町) 동작정(銅雀町) 신길정(新吉町) 번대방정(番大方町) 도림정(道林町) 상도정(上道町) 양화정(楊花町)으로 이름을 바꿔 그에 속하여 경성부 영등포출장소 영등포정 당산정 양평정 노량진정 본동정 흑석정 동작정 신길정 번대방정 도림정 상도정 양화정이 되었다. 한편 서울특별시(特別市)가 1981년에 간행한 <<서울육백년사(六百年史) 제사권(第四卷)>>에 의하면 경성부가 출장소를 설치한 것은 1914년이 처음으로 그 때 동부출장소(東部出張所) 서부출장소(西部出張所) 북부출장소(北部出張所) 용산출장소(龍山出張所)를 설치하였다가 1915년 용산출장소(龍山出張所)만을 남기고 폐지했던 것을 1936년 다시 동부출장소(東部出張所)와 영등포출장소(永登浦出張所) 설치하여 당시 경성부에 용산출장소 동부출장소 영등포출장소 등 3개의 출장소를 두었고, 1940년에는 서부출장소(西部出張所)를 다시 설치하여 당시 경성부에 용산출장소 동부출장소 영등포출장소 서부출장소 등 4개의 출장소를 두었다고 한다. 경기도 시흥군에 영등포읍이 설치되는 것은 1931년이다. 경기도 시흥군 영등포면(永登浦面)을 영등포읍으로 승격시켰다. 당시 영등포읍에는 영등포리(永登浦里) 당산리(堂山里) 양평리(楊坪里)가 속해 있었다. 경기도 시흥군에 영등포면이 설치되는 것은 1917년이다. 이 때 일제는 경기도 시흥군 북면(北面)에 속해 있던 영등포리 당산리 양평리를 따로 떼어내어 영등포면으로 독립시켰다. 경기도 시흥군 북면이 설치되는 것은 1914년이다. 이 때 일제가 대대적인 행정구역개편을 하면서 시흥군에 경기도 과천군(果川郡)과 경기도 안산군(安山郡)을 병합시키고 북면(北面)을 설치하였다. 북면은 경기도 시흥군 상북면(上北面)과 하북면(下北面), 경기도 과천군 하북면(下北面)을 통합하여 설치되었다. 당시 경기도 시흥군 북면에는 도림리(道林里) 구로리(九老里) 당산리(堂山里) 양평리(楊坪里) 신길리(新吉里) 번대방리(番大方里) 영등포리(永登浦里) 노량진리(鷺梁津里) 본동리(本洞里) 흑석리(黑石里) 동작리(銅雀里)가 속해 있었는데 도림리 구로리 당산리 양평리는 시흥군 상북면에 속해 있던 마을이고, 신길리 번대방리 영등포리는 시흥군 하북면에 속해 있던 마을이며, 노량진리 본동리 흑석리 동작리는 과천군 하북면에 속해 있던 마을이다. 이때 군소재지(郡所在地)와 면소재지(面所在地)는 영등포리였다. 영등포리가 군소재지와 면소재지가 된 것은 시흥군이 과천군과 안산군을 통합하기 전인 1910년 시흥군의 군소재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전에는 지금은 금천구(衿川區) 시흥동(始興洞)이 된 시흥군 읍내면(邑內面) 읍내리(邑內里)가 군소재지였는데 1910년에 영등포리로 옮겼다. 군소재지를 영등포리로 옮긴 것은 1899년 9월 경인선철도(京仁線鐵道)가 완공되면서 영등포리에 영등포역(永登浦驛)이 세워져 교통의 요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시흥군이라는 지명이 이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1895년의 일이다. 이전에는 경기도 시흥현(始興縣)이던 것을 이 때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현(縣)을 군(郡)으로 바꾸고 인천부(仁川府)에 속하게 하였다가 다음해 다시 경기도에 속하게 하였다. 시흥현이라는 지명이 이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1795년의 일이다. 본래는 금천현(衿川縣)이던 것을 조선(朝鮮) 정조(正祖) 19(1795)년에 그렇게 바꾼 것이다. 시흥(始興)은 나중에 금천으로 이름을 바꾸는 금주(衿州)의 별호(別號)였는데 조선 정조 때에 이르러 공식적인 고을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를 보면 ‘금주(衿州)의 별호는 시흥(始興)인데 성종(成宗)이 정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 고을의 수령은 종6품(從六品)의 현감(縣監)에서 종5품(從五品)의 현령(縣令)으로 승격되었다. <<정조실록(正祖實錄)>> <19년 윤2월 계미(癸未)>를 보면 ‘금천현감(黔川縣監)을 현령(縣令)으로 승격시키고, 읍호(邑號)를 시흥(始興)으로 바꿨는데 이는 옛 읍호를 따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금천현이라는 지명이 이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1413년 조선(朝鮮)에 들어와서이다. 고려(高麗) 때부터 금주현(衿州縣)라고 부르던 것을 조선 태종(太宗) 13(1413)년에 이르러 금천현으로 바꾼 것이다. 조선 현종(顯宗) 때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편찬한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금천현(衿川縣)>을 보면 ‘조선 태종 때 금주현(衿州縣)을 바꾸어 금천현(衿川縣)이라 하였다.’고 하고, 또 ‘태종 14(1414)년 과천(果川)을 없애고 합하여 금과현(衿果縣)이라고 하였다가 몇 달이 안 되어 혁파하였고, 또 양천(陽川)을 병합하여 금양현(衿陽縣)이라고 하였다가 일 년 만에 혁파하고 태조 16(1416)년 다시 금천현(衿川縣)으로 이름을 바꾸고 현감을 두었다. 세조(世祖) 때는 금천현을 없애고 과천에 병합한 일도 있었으나 얼마 안 되어 각기 이전대로 회복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동국여지지>>의 기록 중 세조 때의 기록에는 약간에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금천을 없애고 과천에 병합한 것이 아니라 세조 2(1456)년 금천과 과천을 합하여 치소(治所)를 금천에 두었다가 6(1460)년 과천의 치소를 회복한 것이 그 본말이니 과천에 금천이 병합된 것이 아니라 금천에 과천이 병합되었었다고 보아야 옳다. <<세조실록(世祖實錄)>> <2년 7월 신미(辛未)>를 보면 ‘이조(吏曹)에 전지(傳旨)하기를 ‘금천(衿川)과 과천(果川)을 합하여 한 현(縣)으로 만들고, 임진(臨津)과 장단(長湍) 임강(臨江)을 합하여 한 현으로 만들어 금천과 임진으로 치소(治所)를 삼게 하라.’고 하였다.’고 하였고, <6년 5월 무인(戊寅)>을 보면 ‘이조(吏曹)에서 과천현 백성들이 상언(上言)한 것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일찍이 본현(本縣)을 혁파하여 금천현(衿川縣)에 속하게 하였으나 다만 본현(本縣)이 금천(衿川)과 거리가 30여 리(里)이고, 또 길옆에 있어서 사객(使客)이 더욱 번잡하나 사람과 물자는 지나치게 적어서 양현(兩縣)에 분주(奔走)하게 왕래하면서 수발하기가 어려우니 청컨대 치소(治所)를 본현(本縣)으로 옮겨 주소서.’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고 하였다. 금주현이라는 지명이 이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고려 초이다. 신라(新羅) 때부터 곡양현(穀壤縣)이라 부르던 것을 이 때 바꾼 것이다. 금주의 금(衿)은 검(黔)으로도 썼는데 성종(成宗) 때에 이르러 고을의 수령격인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때 혁파하였고, 현종(顯宗) 9(1018)년에는 지금은 인천광역시 부평구(富平區)가 된 수주(樹州)에 속하였으며, 명종(明宗) 때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감무를 두었다는 것은 금주현이 독립적인 고을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곡양현이라는 지명이 이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신라 경덕왕(景德王) 16(757)년의 일이다. 본래 잉벌노현(仍伐奴縣)라고 부르던 것을 이 때 곡양현으로 이름을 바꾸고 지금은 과천시(果川市)가 된 율진군(栗津郡)의 속현(屬縣)으로 삼았다. 김정호(金正浩, ?~1864)가 1864년에 저술한 <<대동지지(大東地志)>> <시흥(始興)>을 보면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16년 일벌노(仍伐努)를 곡양(穀壤)으로 바꾸고 율진군(栗津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잉벌노현은 본래 백제(百濟) 땅이었는데 고구려(高句麗)가 취하여 현을 설치한 것이다. <<동국여지지>> <금천현>을 보면 ‘금천현은 본래 백제 땅이었는데 고구려가 취하여 잉벌노현(仍伐奴縣)을 삼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잉벌노현을 설치하기 이전 백제에서 잉벌노현을 어떤 이름으로 불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니 잉벌노현은 이 지역을 지칭하던 가장 오래된 이름인 셈이다. 한편 영등포구는 8·15해방을 맞고 난 다음해인 1946년 경성부가 서울특별시로 바뀌면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가 되었으며, 영등포구에 속해 있던 마을이름도 일본식 마을지칭인 정(町)을 청산하고 동(洞)으로 지칭하게 되었다. 영등포구는 1949년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확장으로 경기도 시흥군 동면(東面)에 속해 있던 구로리(九老里) 도림리(道林里) 번대방리(番大方里)를 편입하였다. 이에 따라 구로리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구로리가 되었고, 도림리는 이름을 바꾸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도림리(新道林里)가 되었으며, 번대방리는 이름을 바꾸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대방리(新大方里)가 되었다. 구로리 신도림리 신대방리는 1950년 리(里)라는 마을지칭을 청산하고 구로동(九老洞) 신도림동(新道林洞) 신대방동(新大方洞)이 되었다. 영등포구는 1963년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확장으로 경기도 김포군(金浦郡) 양동면(陽東面) 양서면(陽西面)을 편입하고, 부천군(富川郡) 오정면(吾丁面) 오곡리(五谷里) 오쇠리(五釗里)와 소사읍(素砂邑) 항리(航里) 온수리(溫水里) 궁리(宮里) 천왕리(天旺里) 오류리(梧柳里) 개봉리(開峰里) 고척리(高尺里)를 편입하는 한편 시흥군 신동면(新東面)과 동면(東面) 시흥리(始興里) 독산리(禿山里) 가리봉리(加里峰里) 신림리(新林里) 봉천리(奉天里)를 편입하였다. 김포군 양동면과 양서면은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양천군(陽川郡)이었다가 김포군에 통합되었던 지역으로 당시 양동면에는 가양리(加陽里) 마곡리(麻谷里) 등촌리(登村里) 염창리(鹽倉里) 신정리(新亭里) 목동리(木洞里) 화곡리(禾谷里) 신당리(新堂里)가 속해 있었고, 양서면에는 내발산리(內鉢山里) 외발산리(外鉢山里) 송정리(松亭里) 과해리(果海里) 방화동(傍花洞) 개화동(開花洞)이 속해 있었다. 또한 시흥군 신동면에는 잠실리(蠶室里) 반포리(盤浦里) 방배리(方背里) 사당리(舍堂里) 양재리(良才里) 신원리(新院里) 우면리(牛眠里) 서초리(瑞草里)가 속해 있었다. 이들 리(里)들은 영등포구에 편입되면서 리(里)라는 마을지칭을 청산하고 모두 동(洞)이 되었는데 이 때 목동리(木洞里)가 목동(木洞)이 되었고, 신당리가 신월동(新月洞)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송정리가 공항동(空港洞)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또한 잠실리가 잠원동(蠶院洞)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신원리(新院里)가 둘로 분리되어 신원동(新院洞)과 원지동(院趾洞)이 되었다. 1973년 관악구(冠岳區)가 새로 설치되면서 영등포구에 속해 있던 노량진동(鷺梁津洞) 본동(本洞) 상도동(上道洞) 봉천동(奉天洞) 흑석동(黑石洞) 동작동(銅雀洞) 사당동(舍堂洞) 방배동(方背洞) 상도1동(上道1洞) 신림동(新林洞) 대방동(大方洞) 신대방동(新大方洞) 잠원동(蠶院洞) 반포동(盤浦洞) 서초동(瑞草洞) 양재동(良才洞)이 분리되어 나가 서울특별시 관악구에 속하게 되었다. 이 중 상도1동은 어느 때인가 상도동에서 분리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989년에 간행된 <<서울특별시 동명연혁고>> <관악·동작구편(冠岳·銅雀區篇)>을 보면 ‘상도1동(上道1洞)은 상도동(上道洞)에서 분리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1955년 4월 18일 서울특별시조례(特別市條例) 제66호에 의거한 동제(洞制) 실시 때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1977년 강서구(江西區)가 새로 설치되면서 영등포구에 속해 있던 염창동(鹽倉洞) 목동(木洞) 등촌동(登村洞) 화곡동(禾谷洞) 신월동(新月洞) 마곡동(麻谷洞) 가양동(加陽洞) 내발산동(內鉢山洞) 외발산동(外鉢山洞) 공항동(空港洞) 방화동(傍花洞) 개화동(開花洞) 과해동(果海洞) 오곡동(五谷洞) 오쇠동(五釗洞) 신정동(新亭洞)이 분리되어 나가 서울특별시 강서구에 속하게 되었다. 또한 이 해에 신도림동(新道林洞)에서 대림동(大林洞)이 분리되어 독립하였다. 지금은 도림천(道林川)이라 부르는 마장천(馬場川)을 경계로 동쪽지역이 나뉘어 대림동(大林洞)이 된 것이다. 한편 강서구에 속해 있던 목동 신정동 신월동은 1988년 양천구(陽川區)가 강서구에서 분리되어 새로 설치되자 서울특별시 양천구 목동 신정동 신월동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