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지산에 농암(籠巖)과 난가대(爛柯臺)가 있다. 농암은 전국 어디에나 흔히 등장하는 농바위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고, 난가대는 난가굴(爛柯窟)이라고도 불렸다. <<여지도서>> <금천, 형승>을 보면 농암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농암(籠巖)이 난가굴(爛柯窟) 아래에 있다. 바위가 수십 인이 앉을 수 있을 만큼 넓다. 모양이 대바구니 같아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또 <<여지도서>> <금천, 고적>을 보면 난가대(爛柯臺)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검산(黔山) 중에 석실(石室)이 있는데 넓이가 한 칸이 넘는다. 위에 석문(石門)이 있고, 석실 중에 돌바둑판이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는 ‘선인(仙人)이 내려와 바둑을 두고 놀았다.’고 한다. 고을사람 송도항이 난가대(爛柯臺) 세 자를 새겼다. 송도항(?~?)이 어떠한 분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승정원일기>> <영조 즉위(1724)년 10월 3일>을 보면 ‘송도항(宋道恒)이 첨지(僉知)가 되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아마도 이 분이 그 분이 아닐까 싶다. 첨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의 준말로 중추부(中樞府)에 속했던 정3품의 벼슬로 무관에게 주던 대우직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