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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동에 있던 원(院)집 양화도원(楊花渡院)
작성자 관** 등록일 2017-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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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院)집이란 고려 조선시대 공무로 여행하는 벼슬아치들이나 일반인 여행자들을 위해 관아 근처나 역(驛), 역과 역 사이에 등에 설치했던 숙박시설을 말한다.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이태원이니 사리원이니 조치원이니 하는 지명은 이같은 원집이 있었던 데서 유래하는 것이다.

 

대개 나라에서 설치했지만 고려시대의 경우 나라에서 설치한 원집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개인이 설치한 원집이나 절에서 설치한 원집도 많았다.

그러나 개인이나 절이 설치했던 원집은 조선시대에 들어 역원(驛院)제도가 정비되면서 국유화되었다. 

 

양화도원이 설치된 시대가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고려시대에 이미 설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려시대에 이미 양화도(楊花渡)라는 나루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 이미 양화도나루가 설치되어 있었다면 나루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한 원집 역시 설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양화도원이라는 원집의 위치는 지금은 양평동이 된 양평리(楊坪里)에 있었던 것 같다. 양화도(楊花渡)나루가 양평동에 있었다.

 

1530년에 저술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양화도원(楊花渡院)이 양화도 남쪽 언덕에 있다고 하였다. 양화도원은 양화원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양화도원은 다른 원집들이 그렇듯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 철폐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700년대 중반에 저술된 <<여지도서>>에는 양화도원이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1842~1843년에 저술된 <<시흥읍지>>를 보면 양화원(楊花院) 지금은 없다 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원집들이 철폐되게 된 것은 상업활동이 활발하게 되면서 객주집이나 주막집들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지금은 양평동이 된 양평리는 양화도와 양화도원에 힘입어 그 주변의 마을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큰 마을로 성장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1895년에 저술된 <<기전읍지>> <시흥현읍지여사례성책, 사례(事例)>에 의하면 당시 지금은 당산동이 된 당산리의 총가구수가 8집이었던 데 비해서 양평리의 총가구수는 72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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