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0년에 저술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양화도원(楊花渡院)이 양화도 남쪽 언덕에 있다고 하였다. 양화도원은 양화원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양화도원은 다른 원집들이 그렇듯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 철폐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700년대 중반에 저술된 <<여지도서>>에는 양화도원이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1842~1843년에 저술된 <<시흥읍지>>를 보면 양화원(楊花院) 지금은 없다 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원집들이 철폐되게 된 것은 상업활동이 활발하게 되면서 객주집이나 주막집들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지금은 양평동이 된 양평리는 양화도와 양화도원에 힘입어 그 주변의 마을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큰 마을로 성장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1895년에 저술된 <<기전읍지>> <시흥현읍지여사례성책, 사례(事例)>에 의하면 당시 지금은 당산동이 된 당산리의 총가구수가 8집이었던 데 비해서 양평리의 총가구수는 72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