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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사정
작성자 관** 등록일 2017-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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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지역에서 제일 유명했던 정자는 노량진동에 있던 효사정(孝思亭)이다.

효사정은 조선 세종 때 노한(盧?, 1376~1443)이 고사리에 세운 정자였다.

 

고사리(高寺里)는 1,700년대 중엽까지 이곳 영등포가 속해 있던 금천현의 하북면(下北面)에 속해 있다가 과천현(果川縣) 하북면(下北面)에 편입되었고, 1914년 일제의 대대적인 행정구역개편으로 과천이 시흥에 통합될 때 지금은 노량진동인 시흥군(始興郡) 북면(北面) 노량진리가 된 마을이다.

 

노한은 조선 세종 때의 문신으로 본관이 교하(交河)이고, 자가 유린(有隣)이며, 호는 효사당(孝思堂)이고, 시호가 공숙(恭肅)이다.

민제(閔霽, 1339~1408)의 사위이자 태종의 동서이고, 영의정을 지낸 노사신(盧思愼, 1427~1498)의 조부(祖父)이기도 하다. 정종(定宗) 2(1400)년에 공조의랑(工曹議郞)이 되었고,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거쳐 태종 3(1403)년에는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으며,

이조전서(吏曹典書)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등을 거쳐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있던 9(1409)년 처남 민무구(閔無咎, ?~1410) 형제의 옥사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가 세종 4(1422)년에 다시 한성부윤으로 복관되고, 그 뒤 형조판서(刑曹判書) 찬성사(贊成事) 대사헌(大司憲) 등을 벼슬을 거쳐 17(1435)년에는 우의정(右議政)이 되었으나 19(1437)년 언사(言事)가 임금의 뜻에 거슬려 파직된 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고사리에 내려와 살다가 세상을 떠난 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효사정(孝思亭)이 노량도(露梁渡) 남쪽 언덕에 있는데 우의정(右議政) 노한(盧?)의 별서(別墅)이다.

별서는 전장(田莊)이 있는 부근에 따로 한적(閑寂)하게 지은 집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효사정은 그 뒤 허물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1,700년대 중반에 편찬된 <<여지도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효사정 옛터가 노량(露梁) 남쪽 언덕에 있다. 우의정(右議政) 노한(盧?)이 어머니 왕(王)씨의 상을 당하여 장례를 마친 다음 집의 북쪽 언덕에 정자를 지어 여막을 삼고 올라 바라봄으로써 부모님을 사모하는 회포를 풀었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효사정(孝思亭)이라고 한다.

노한의 어머니 왕씨가 돌아간 것은 세종 21(1439)년의 일이고, 그 때 노한의 나이는 64세였다.

효사정이란 정자이름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하는 조선 성종(成宗) 때의 문신인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 지은 <기문(記文)>에 의하면

강희맹의 아버지로 조선 세조(世祖) 때의 문신인 강석덕(姜碩德, 1395~1459)이 노한의 아들이자 노사신의 아버지로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낸 노물재(盧物載, ?~1446)의 부탁으로 지었다고 한다.

 

효사정을 세운 노한(盧?)의 조부(祖父)가 노진(盧?, ?~?)인데

노진은 고려 공양왕(恭讓王)의 장인이었다. 노진은 시호가 제효(齊孝)이다. 공민왕(恭愍王) 21(1372)년에 판밀직(判密直)이 되어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고, 22(1373)년에는 평리(評理)가 되었으나 우왕(禑王) 2(1376)년 그 아들 노선(盧瑄, ?~1376)이 홍윤(洪倫, ?~1376) 등과 역모를 꾀하다가 죽임을 당하자 그로 인하여 유배되었다가 아들인 노한의 아버지 노균(盧鈞, ?~?) 등과 함께 주살되었다.

 

1389년 공양왕이 즉위하여 딸이 순비(順妃)가 되자 창성군(昌城君)에 추증되었다.

노한의 어머니가 왕(王)씨인 것과 그가 효사정을 짓게 된 이면에는 이와 같은 슬픈 가족의 역사가 있다.

한편 노한의 어머니 왕씨, 노한과 그의 처 민씨, 노한의 아들 노물재, 노물재의 아들 노사신, 노사신의 아들인 영돈녕(領敦寧) 노공필(盧公弼, 1445~1516)의 묘 등 교하 노씨의 선영이 고사리에 있었다. 그러나 이들 묘는 근래에 후손들이 경기도 파주시(坡州市) 파주읍(坡州邑) 백석리(白石里)로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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